추석 연휴를 앞두고 대학병원 수술실의 절반가량이 문을 닫는 등 국민 불안이 확산하고 있다.
응급실 대란이 발생하면서 부산에서는 공사장에서 추락한 근로자가 응급실을 찾아 여기저기 전전하다 숨지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광주에서는 조선대학 구내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된 학생이 대학병원에 응급전문의가 없어 인근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소아 응급센터의 경우 전국 11곳 가운데 7군데에서만 진료가 제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런데도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달 29일 “비상 진료체제가 원활히 가동되고 있다”라며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을 드러냈다.
박인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라디오에서 “본인이 전화해서 알아볼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은 경증”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로 국민의 공분을 샀다.
지난 6일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가 “의료현장의 진료서비스를 정상화하면서 의료개혁이 효율적으로 진행될 수 있어야 한다”라며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을 제안했다.
대통령실은 한 대표의 제안을 수용하며 “(2026년 의대 증원)2,000명이라는 숫자에 구애되지 않고 합리적 안을 가져오면 논의한다는 방침”이라고 밝혔다.
민주당도 여‧야‧의‧정 협의체 구성제안에 대해 “즉시 가동하자”라며 환영했다.
의대 증원 문제로 7개월째 이어져온 의료대란을 해결할 계기가 마침내 마련된 것이다.
다만 의료계의 대화 참여 여부는 미지수다. 전공의 등 일부에서 여전히 2025년 의대 증원원점 재검토를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의료현장은 전공의 이탈 장기화로 비정상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지방뿐만 아니라 일부 수도권 대형병원 응급실까지 제한 운영에 들어갔고 ‘응급실 뺑뺑이’로 인한 피해가 커지고 있다.
추석 연휴 동안 의료공백이 우려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와 의료계는 그동안 대화 없이 상대와 싸워 이기려고만 했다.
정부는 의료 개혁은 물러설 수 없는 과제라며 정원 조정에 경직적 태도를 보였다. 응급실 진료 차질은 과장된 것이라며 시간만 보냈다.
일부 의사들은 큰 인명피해나 의료대란이 일어나 정부가 백기 투항하기를 바라는 듯했다. 전공의들은 아예 대화의 문을 닫았고 의사협회는 정치적 구호만 외쳐댔다.
아직 문제가 해결되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의료계가 책임 있는 대표들을 여‧야‧의‧정 협의체에 보낼 수 있느냐이다.
지금 의료계는 전공의와 의사협회, 의대 교수, 병원협회 등으로 분열돼있다. 협상 상대가 불분명해졌다. 대표가 나와서 합의를 한다 해도 의료계가 다른 측에서 거부할 수도 있다.
의료계가 지혜를 모아 사태를 끝내는 전환점을 만들어야 한다. 이번 협의체는 전공의 처우개선과 수가 조정, 의사 사법리스크 경감 등 오랜 숙원을 해결할 기회이기도 하다.
의사들은 정부가 자신들을 “악마화하고 있다”라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으나 받아들이기 어렵다.
국민이 보기에는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일 뿐이다. 만일 일부 의사들이 분개하는 것처럼 정부가 자신들을 정책협의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것이 문제라면 여‧야‧의‧정 협의체에 적극 참여하면 될 것이다.
의료계는 이 협의체를 통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대안을 내기 바란다. 전공의들의 집단사직으로 촉발된 의료공백이 벌써 7개월이 다 되지 않았는가?
의사들이 의대 증원에 반대하며 집단행동을 벌인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이스라엘 의사들이 2011년 급여 인상과 인력확충을 요구하며 8개월 동안 파업한 적이 있으나 의사 수 증가 자체를 반대하며 의사들이 환자 곁을 떠난 일은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정부가 2025년 의대 인원을 1,509명을 증원했다고 대부분의 전공의들이 반년이 지나도록 복귀하지 않고 있다.
의료공백이 길어지면서 국민의 불안은 커지고 있으나 정부의 정책 기조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국민 여론은 여전히 정부의 의대 증원을 지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7개월만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라는 식으로 의사들을 적으로 모는 태도를 보여서는 개혁이 성공할 수 없다. 의대 증원과 의료 개혁도 국민의 건강과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의사들을 설득시키지 못해 의료 개혁이 좌초한다면 이 또한 정부의 역량 부족 탓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정부 또한 보다 유연한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 증원 자체는 필요하지만, 왜 2,000명이어야 하는지는 논리와 설득력이 충분하지는 않았다.
정부의 손을 들어준 법원조차 증원 규모 조정 가능성을 언급했다.
의료 개혁이 어려운 이유는 증원 규모 계산 때문이 아니라 의료계를 설득해 변화에 동참시키는 과정이 지난한 탓이다.
툭 숫자를 던져놓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방식은 결국 국민의 고통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이번에 여실히 보여줬다.
정부와 의료계, 정치권 모두 합리적 대안을 내고 상호 타협하는 것이 지난 6개월여 동안 고통을 감내해온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다.
류근찬
통일이답이다국민운동본부 상임고문
제 17대, 18대 국회의원
강대일 hykku@hanmail.net